백두산과 연변 | 오금표 | 2016-07-0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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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과 연변 대전서남지방 목회자 30명과 함께 4박5일 동안 함께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과 조선족이 고향을 그리워하며 사는 연변조선족자치주 지역을 방문하고 민족의 아픈 역사와 북방선교의 비전을 공유하며 함께 기도하고 돌아왔습니다.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이고 북쪽으로는 북한이 가로막고 있어서 오랫동안 자유로운 해외여행을 자재해왔습니다. 그러나 여행이 자유화되고 우리 국민들은 좋은 나라에서 살기 때문에 세계 곳곳마다 여행하고 우리 민족이 살고 있는 현장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민족의 아픈 역사와 함께 위대함을 깨달았습니다. 중국에서 흔히 동북 삼성이라고 하는 요령성과 길림성과 흑룡강성은 한반도의 3배도 넘는 넒은 들판에 고구려 발해 등 우리의 역사가 숨 쉬고 있는 땅입니다. 우리는 이곳을 만주라고도 하고 우리민족의 선구자들이 말달리던 땅이며, 200만의 조선족이 살고 있는 곳입니다. 특별히 길림성의 1/4에 해당하는 연변조선족자치주(延邊朝鮮族自治州)에는 인구 70만의 연길(延吉)과, 북간도에 대성중학교가 있는 시인 윤동주로 알려진 용정(龍井)이 있습니다. 또 발해의 도읍지 돈화(敦化)가 있고, 고구려의 수도이자 광개토왕비가 있는 집안시가 있습니다. 이밖에도 통화시, 백두산 지역의 이도백하시, 두만강변의 도문(圖們)시, 화룡(和龍), 혼춘(琿春) 등이 있습니다. 이미 한(漢)족이 중심이 된 만주에는 청나라를 세웠던 만주족의 옛 영화는 살아지고 중국화 되었고, 조선족들도 중국인의 일원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글을 그대로 사용하고 간판에도 한글과 한문을 섞어서 사용합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의 근거지였으며 청산리항일전승지, 봉오동항일전승지, 일송정 등 유적지가 많이 있습니다. 조선말에 북간도라고 하는 용정에 있는 대성중학교는 윤동주 시인뿐만 아니라 문익환 목사와 정일권 전 총리의 모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6.25를 격으면서 그들은 남한이 아직도 일제에 해방되지 못하고 미국의 침략에 시달리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공산당이 이끄는 중공군으로서 인민해방군으로, 일명 인해전술의 희생물로 6.25에 참전했습니다. 공산주의에 철저하게 유린당하고, 삼자교회를 선택한 교회들은 문화혁명 때 대부분이 타도의 대상이 되어 우리민족의 선구자들과 함께 만주벌판에서 살아지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기독교인이 살아졌다는 것은, 중국내 다른 지역에서는 삼자교회(공산당이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교회로 자치 자양 자전을 의미합니다)도 있지만 대부분이 신앙의 자유를 위하여 지하교회의 형태로 성장해 왔습니다. 그런데 연변에는 다른 지역에 비하여 지하교회들이 적었는데, 중국이 개방하면서 한국의 많은 선교사들이 들어가고 북한선교의 중요한 전초기지로서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길림성의 성도이며 만주족의 옛 수도인 장춘(長春)에 도착하여 통화 지역으로 이동(약4시간)하여 다음날 고구려의 찬란한 유산을 간직한 옛 수도 집안(集安)에 갔습니다. 집안(集安)시는 압록강변 도시로서 건너편에는 북한의 벌거숭이산들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압록강에서 배를 타고 북한의 초소와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주민들과 어린아이들을 볼 수 있었고 농사하는 농부들이 간간히 보였습니다. 집안은 AD3년경 고구려의 제2대왕인 유리왕이 졸본성에서 국내성으로 천도하였는데 427년까지 수도로서 찬란했던 번성기를 누렸던 만큼 1만 여개의 고분과 수많은 유적지가 남아있습니다. 광개토대왕비, 태왕릉, 장수왕릉, 국내성터 등 고구려의 많은 문화유산이 산재하고 있어 융성했던 시대의 발자취를 살펴보았습니다. 광개토대왕릉/비는 414년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이 광개토대왕 재위 22년간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한반도 최대의 비석입니다. 장수왕릉(장군총)은 고구려의 대표적인 돌무덤으로 동방의 피라미드라고도 하는데, 고구려 20대왕인 장수왕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또 오회분오호묘는 5개의 봉토 중 5번째에 해당하는 분묘라는 뜻으로 6세기 중반에 만들어진 고구려 시대의 벽화고분입니다. 다음날 백두산 서파코스 입구에서 셔틀버스로 환승하여 백두산에 갔습니다. 그러나 백두산은 우리 민족의 영산이 아니라 이미 중국의 관광지 장백산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관광객들은 일본인이나 서구인이 거의 없고 절반이상이 한국인이고 절반이 중국인입니다. 그런데 한국어 안내나 방송을 하지 않습니다. 의도적으로 중국의 영토임을 강조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나빴습니다. 나에게는 징크스가 있습니다. 비오는 날 봉고차 뒤 타면 멀미납니다. 그런데 환경보호라는 이름으로 내가 보기에는 중국적인 상업의 일환으로 셔틀버스를 이용하는데 봉고차 뒤를 타야했습니다. 여지없이 멀미나고 눈이 쌓인 날씨에 춥고 정상에는 올라갔지만 천지를 보지 못하고 민족의 통일과 복음전파를 위하여 눈물로 기도하고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나만이 아니라 모두가 같은 마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천지(天池)는 화산의 분화구에 생성된 것으로 해발 2,200m에 위치해 있으며, 백두산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는 데에서 '천지'라는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주차장에서 정상까지 1,400여개의 계단을 도보로 올라가야합니다. 백두산에서 내려와서 두부를 파는 사람들과 산삼을 파는 사람들이 있지만, 컵라면이 먹고 싶었지만 더 중요한 우리 민족의 역사와 백두산의 의미 등을 동료들과 함께 나누었습니다. 다음날 이도백하(백두산북파지역)시에서 숙박하고 다시 백두산의 북파지역으로 등정을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도 비가오고 어제보다 환경이 더 안 좋습니다. 결국 어렵게 백두산 정상에 올라갔으나 천지를 조망하지 못하고 금강대협곡과 비룡폭포(중국에서는 장백폭포)를 다녀서 온천지에서 싸우나로 몸도 마음도 풀었습니다. 이번에 백두산과 연변을 가기 전에 관련동영상을 10여 편을 보고 역사와 상황을 공부하면서, 중국의 동북공정이나 국토를 관리하지 못하고 무너지는 북한의 현실들이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가보고 더 심각하게 알았습니다. 그래서 생각하기를 목회자로서 이런 아품을 알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이제는 통일의 그날까지는 백두산을 다시는 가지 않겠다고 마음먹습니다. 그리고 이번 여행에서 몇 가지를 새롭게 알기도 하고, 재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1. 백두산(白頭山)은 해발 2,744m로 산 위에는 사시사철 흰 눈이 쌓여 있어 백두 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화산재가 흰색이라 여름에도 눈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백두산은 송화강 두만강 압록강의 발원지이자, 우리민족에게는 영산이지만, 중국인들의 동북공정에서도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부분이 있습니다. 2. 연변의 조선족들은 이미 자본주의와 한국에 익숙해져서 연변을 떠나 중국의 각지에서 관광업을 하거나 중국내 한국기업에 취업을 했습니다. 그리고 중국화 된 중국인이고 공산주의의 배경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조선족의 자체방송인 연변방송에서 언어나 생활환경이 북한식이 아닌 한국식으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3. 이번 여행에서는 가보지 못했지만 북한과 중국의 국경지역으로 두 곳은, 두만강의 도문은 중국에서 북한의 남양시와 회령시를 가까이 볼 수 있는 곳입니다. 또 한곳은 압록강하변의 단둥입니다. 북한과의 교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우리나라 기업들이 진출해 있고 북한의 신의주와 가까운 지역입니다. 4. 용정중학교(옛,대성중학교)는 민족시인 윤동주가 다녔던 학교로, 현재는 용정제일중학교(龍井第一中學校)로 명칭이 바뀌어 학생들이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처음 설립당시의 기독교정신에 입각한 신앙교육이 아니라 공산화된 연변사람들의 교육일 뿐입니다. 언제나 이곳이 회복되고 또다시 우리민족의 위대한 역사를 다시 써갈 수 있을까! 5. 민족시인 윤동주는 그의 서시에서 우리에게 큰 감동을 주고, 위대한 작품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남기고 1945년 해방을 불과 6개월이 남았는데, 28세의 젊은 나이로 일제의 생체실험 대상으로 교도소에서 순국합니다. 이런 민족의 한이 서려있는 중국의 동북삼성지역이 정말 중국 땅인가 마음이 무겁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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