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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이 지치는 이유 | 탁예은 | 2020-08-2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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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지치는 이유 처음 이스라엘에 와서 적응하면서 이런저런 일을 하는 동안, 나는 내가 하는 ‘사역’이 나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하고 있는 ‘일’ 속에서 나의 부르심을 찾았고, 그 일로 인해 기뻐하고 만족스러워 하였다. 일하지 않으면 뭔가 불안하고, 불편하고, 잠잠히 있지를 못하고, 주 앞에 머물지 못하는 신비한 현상(?)까지 생겨나게 되었다. 그렇게 점점 지쳐갔다. 마르다처럼. _ 마르다는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고 마음이 분주했다. (“이것도 더 해야겠다. 저것도 좀 더 해야 할 것 같은데. 아니 저. 마리아가!!) 예수님을 영접해서 준비에 바쁜 마르다가 잘못한 것인가? 아닌 것 같다. 그런데 주님은 그 문제 근원을 드러내신다. 그녀는 왜 지쳤을까?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이 없이 분주하게 내 뜻대로, 내 계획대로 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오셔서 말씀하시는데도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하여, 예수님의 생명을 주시는, 회복을 주시는 말씀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지치는 것이다. 이는 마치 씨를 뿌리는 자가 말씀과 생명의 씨를 뿌리지만, 그 씨를 받아들이는 마음의 밭에 심기지 못하고,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생각에 갇혀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모습과 같다.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vs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 마 13:22,23 나는 어떤가? 해야 할 일들이 많고, 만나야 할 사람들도 많고, 여러 상황과 환경들이 우리를 분주하게 한다. 솔직히, 바쁘고 분주하게 일정을 보내면 뭔가 뿌듯하다.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들을 것 같다. 반대로 홀로 잠잠히 주님 앞에서 기도와 말씀 안에 머물고 있으면, 어딘가 좀 어색하고 불편하고 오랜 시간 동안 있기가 힘들 때가 있다. 기도하기보다는 이 시간에 뭔가를 해야 한다는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성경말씀을 통해 나 자신을 점검하고, 그분 앞에 엎드려 주의 음성을 듣기보다는 뭐라도 해서 성과를 내야 한다는 마음이 밀려온다. 그래서, 잠잠히 주의 임재 안에 머물러야 함에도 마음속에서 울려 퍼지는 수많은 생각과 일정들을 고민하면서 조금 기도하고 자리를 박차고 나가게 된다. 그리고 내 계획대로 움직인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습관이 되고, 내 삶의 모습으로 자리잡히면 주님과의 ‘친밀함’은 사라진다. 그러면 지치기 시작하고, 잘못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내 뜻대로 하기 때문이다. 왜 지치는가? 주님의 말씀과 상관없이 하기 때문에 실상은 헐벗고 굶주리며, 영혼의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이것을 꼭 기억해야 한다. 열매는 ‘속도’가 아니라 ‘친밀함’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주의 발치에 앉아 내 생각과 분주함을 멈추고 그분의 말씀을 먼저 듣는 것, 매일 듣는 것, 계속 들으며 순종해가는 것이 먼저다. _ 마르다처럼 준비할 일들이 많지만, 주님은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다고 하신다.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기에 빼앗기지 않을 것이라 하신다. 무엇을 택하였기에 마리아는 빼앗기지 않을까? 그것은 먼저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는 것이었다. ‘친밀함’ 속에 늘 거하면 주님이 원하시는 가장 탁월한 방법으로 사람을 부르시고, 만나게 하시고, 사역하게 하신다. 이것이 주 안에 거하며 친밀함을 누리는 ‘예수님의 선교’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 요 21:5,6 출처)네가 나의 영광을 짓밟았다!_최요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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