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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차드 피스, '거듭남의 회심은 일회적 사건인가, 과정인가?'|참된 안성진 2018-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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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심, 무엇을 알아야 하는가?

 


회심에 관심을 가진 지는 제법 오래 되었다. 직업상 관심을 가진 면도 있다. 나는 40년 가까이 전도 방법을 연구해왔는데 알다시피 전도의 핵심은 회심이다. 효과적인 전도를 하려면 회심의 본질을 정확하고 민감하게 파악해야 한다. 여기에 어려움도 있고 매력도 있다. 교회가 회심을 언제나 명쾌하게 정의내리지는 않기 때문이다. 아니 사실은 무엇이 회심인가를 놓고 이견이 분분한 지경이다.

 

어떤 사람들은 회심을 아주 특별한 용어로 본다. 즉 ‘다메섹 도상에서 사도 바울에게 일어났던 일.’ 이런 식으로 말이다. 이때 회심은 그리스도와 신비하게 마주침, 기독교 원리와 사상을 축으로 일생일대의 혁신을 일으킴, 기독교 공동체에 초점을 맞춘 인간관계의 재정립 등으로 설명할 수 있다.


 

회심, 아주 빨리 또는 천천히 자신을 그리스도와 일치시키려는 결단

 

회심을 좀 더 폭넓게 이해하려는 사람도 있다. 즉, 회심이란 아주 빨리 또는 천천히 자신을 그리스도, 교회와 일치시키려는 결단이라는 것이다. 또 어떤 이는 회심하는 순간에 수반되는 세례나 믿음의 인증 같은 예전적인 행사를 강조한다. 그런가 하면 회심이 과연 필요한 것인지 묻는 사람도 있다. 이들은 과거 경험이 중요한 게 아니라 영적 실재를 계속 찾아나가는 구도와 그것이 어떤 길이든 추구하겠다는 개방성이 바로 그러한 자각, 곧 회심을 일으키는 중요한 요소라고 말한다.

 

아내와 나, 그리고 몇 명의 풀러 신학생들이 모여 시작한 ‘아프리칸 엔터프라이즈’ 모임에서 나는 회심에 관한 모든 전형적인 복음주의 전제를 가지고 전도 사역을 시작했다. 내 생각에 회심이란 크리스천으로서의 삶을 출발하는 경험이었다. 짧은 회개 기도와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께 “예, 주님”이라고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참 기독교인과 명목상의 기독교인은 바로 이 회심 경험에 따라 나뉘어진다고 생각했다. 대개 회심한다고 하면 사도 바울처럼 되는 것이라 여겼다. 갑자기 한 차례 감정이 움직이며 순간적으로 변화가 일어난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나의 회심관은 착실한 자기 반성의 결과라고 볼 수는 없다. 이것은 내가 자라온 교회에서 얻은 양분으로 형성된 전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2,3년 동안 사역을 하고 나서는 회심이 가끔은 내가 가진 선입견대로 일어나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음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나는 조금 혼돈스러웠다. 때로는 사람들이 너무나 조용히 하나님나라로 들어가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성경공부 모임에 참석해 몇 과 공부를 하다보면 그 모임에 나오는 여느 사람들마냥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며 기도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그 속뜻을 잘 모르면서도 말이다. 당신 삶을 그리스도에게 의탁했느냐고 물으면 다른 사람들처럼 정해진 답을 내놓는다. 언제 그런 헌신의 순간을 맞았는지 기억하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더 혼란스러운 경우도 있다. 내가 보기에 어떤 사람들은 제대로 된 ‘회심 경험’을 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사건이 그들의 삶을 바꿔놓지는 못했다. 그들은 회심한 후에도 이전과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 남아프리카 상황에서 ‘회심했다’ 하면 다른 인종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음을 가리키는데 이들의 회심은 그렇지 않았다.

 

또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전도하기 위해 그렇게 노력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 일에 점점 더 의심을 많이 품었다. 그들은 이른바 ‘행복한 이교도’에서 하나님께서 정말 살아계신지, 예수님이 정말 하나님의 아들인지 알고자 고투하는 ‘화난 구도자’가 되었다. 이 ‘구도자들’은 교회 안의 ‘회심한’ 백성들보다는 사회 정의에 더 관심을 가졌다. 회심을 경험하지 않고서도 (우리의 목표는 ‘급작스러운 회심’이었다) 전도에 나선 봉사자도 있었다. 그들은 언제나 예수님을 사랑했고 다른 사람들도 예수님을 만나길 원했다.

 

  

 


인간의 제한적, 소극적인 회심관 VS 성령님의 개방적인 회심관

 

그렇다면 대체 회심이란 무엇인가? 전도 사역을 하면서 이 근본적인 질문에 온전히 답할 수 있는지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전에는 회심을 정확하게 묘사하거나 정의내릴 수 있다고 자신했다. 그렇지만 위에 열거한 한계에 부딪치면서 나는 연구 방향을 잡아갔다. 이제 생각하면 내가 가진 회심관은 너무 제한적이었고 소극적이었다. 성령님께서는 나보다 훨씬 더 개방적인 회심관을 가지고 계셨다.

 

나는 개인적인 동기에서도 회심에 관심을 가졌다. 나는 ‘삶의 변화’라는 주제에 상당히 매력을 느낀다. 성장과 변화가 내게 그리 쉽지 않은 문제이기 때문일 것이다. 회심은 얼른 보기에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만들어지는 온전한 변혁, 바로 그것을 보장하는 일종의 삶의 변화가 아닌가 싶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행하신 구속의 능력을 믿고 자기 삶을 하나님께 열어놓기만 하면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니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그러나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이 점은 회심하기 전의 나를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그렇다. 예수님께 자신을 의탁하고 하나님께 마음을 열면 한 사람의 인생이 근본적으로 달라진다. 성령님께서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도 맞다. 예수님께로 돌아오면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너무 쉽거나 필연적이지는 않다. 회심의 열매는 서서히 맺힌다. 대부분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다시 한 번 나의 ‘즉각적’ 회심관은 흔들렸다. 그래서 나는 책을 읽고 관찰하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은 회심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회심을 어떻게 경험했는가?(또는 경험하지 않았는가?)

 

이러한 개인적인 궁금증은 몇 년 후에 박사 학위 과정으로 이어졌다. 일은 이렇게 시작되었지만 연구는 빨리 끝나지 않았다(회심은 가끔 즉각적으로 일어나지만, 연구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사실 나는 박사 학위 논문을 20년이 넘게 쓴 셈이다. 물론 이 질문에만 전적으로 매달릴 수 없었던 생활 탓도 있다. 하지만 내가 잡은 연구 분야가 너무 광범위하다는 사실을 감안해야 한다.

 

연구를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회심을 깊게 연구하기 위해서 여러 갈래의 신학적인 우회로(교회사, 조직신학, 성경신학, 실천신학, 성경연구)와 사회과학 이론(심리학, 사회학, 커뮤니케이션 이론)들을 알아야 했을 뿐더러, 회심의 의미를 자세히 들여다봐야 했다.

 

특히 사회과학을 공부할 때는 20세기 초 미국 심리학자들이 회심이라는 주제에 왜 그리 열심이었는지(미국에서 심리학이 태동하던 초기에 심리학과 종교 심리학은 거의 동의어처럼 쓰였다) 호기심을 가졌다. 그러다 그만 수 년에 걸쳐 윌리엄 제임스로부터 칼 융에 이르기까지 공부하게 되었다. <종교학회지>에 수록된 수많은 논문들을 뒤적이기도 했다(물론 다른 저널들도 보았다).


 

회개와 믿음, 회심을 규정하는 신약 언어

 

어느새 회심에 관한 개인적 관심은 마가복음으로 이어졌다. 이전부터 마가복음은 내가 제일 관심을 가진 성경이다. 나는 마가복음을 다양한 맥락 속에서 귀납법으로 강의했다. 나 혼자의 생각인지는 모르지만 마가복음은 그 간결함과 직설적인 성격 때문에 이제 막 회심한 사람들이 읽기에 딱 알맞다. 마가복음을 보면 볼수록, 마가가 예수님을 기록하는 방식에 빨려들었다.

 

특히 마가복음을 축조한 방법에 궁금한 점이 많았다. 마가가 예수님에 관한 구전들을 세심하게 골라내고 그것들이 단지 개별적이고 주변적인 이야기로 끝나지 않고 하나의 전체적인 의미를 전달하도록 잘 구성했을 때는, 마가의 마음속에 우선순위가 있었음이 틀림없다. 마가복음을 붙들고 씨름할수록, 내가 회심에 대해 가졌던 의문에 마가가 중요한 깨달음을 열어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언뜻 보아도 마가가 예수님의 이야기를 쓴 목적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다(막 1:1).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해 반응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바로 전도다. 마가복음의 첫 단원(1:16-4:34)은 예수님에게 반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대로 보여준다. 마가는 독자들이 좋은 열매를 맺기 원했다(4:20). 그는 복음서를 써나가면서 분명히 회심이라는 의미를 사용한다.

 

1장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 1:14-15). 회개와 믿음(신앙)은 회심을 규정하는 신약의 언어다. 이어지는 장들에서 마가는 제자도(이 말은 예수님을 계속 따른다는 뜻이다)뿐 아니라 회개와 믿음을 좀더 자세히 밝힌다. 그러면서도 전도한다. 그는 사람들이 회심하길 원했다. 이 일을 하는 그를 찬찬히 뜯어본다면 회심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마가가 바울의 경우와 다른 회심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있음을 포착한 것은 마가복음의 구조(그가 어떻게 복음을 전파하느냐)를 붙들고 고민하던 무렵이다. 그는 복음서에 열두 제자의 회심을 기술했다. 그가 복음서에서 전달하려고 애쓴 것은 이 열두 사람이 오랜 시간에 걸쳐 점차 변화한 ‘과정’이다.

 

그들은 관습상 예수님을 위대한 선생쯤으로 보다가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인 진짜 메시아이심을 경이롭게 발견한다. 마가는 열두 제자가 어떻게 한 걸음씩 예수님에게 돌아서는지 보여주면서, 마가복음을 읽는 독자들도 열두 제자가 경험한 회심 과정을 밟도록 인도한다.

 


'예수 영접'이나 '결신 기도'란 말에 빠진 것

 

이러한 시각이 어떤 의미를 함축하는지는 너무도 분명하다. 교회는 사도 바울에게 일어난 일, 즉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갑작스럽게 맞은 변혁을 다른 사람들도 경험케 하려고 전도하는 데 힘썼다. 전도를 오직 한 가지 주제, ‘지금 이 시간에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이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모든 사람이 어느 때건 “예수님을 영접하겠습니까?”라는 질문에 즉각 응답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했다.

 

예수님을 이해하는 과정중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시간적 배려는 없다. ‘그리스도를 향한 결단’을 즉각 받아내기 위한 전도법들이 고안되었다. 대형 집회의 마지막 순서에는 앞으로 나와 예수님을 향해 결단하라는 메시지가 반드시 들어 있었다. 예수님을 그 자리에서 당장 영접하지 못하고 죽어서 천당에 못 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심어준 게 초대 전도 대화법이다. 결신 기도로 끝을 맺는 전도 소책자들도 나왔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런 노력이 불신자들을 자극할 수는 있다. 성숙한 기독교인들은 자기가 체험한 삶의 변화를 다른 사람들도 경험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하지만 이런 전도법들은 바울이 경험한 회심을 표준 모델로 삼은 데서 나왔다. 예수님을 향해 결단해야 한다고 순식간에 사람들을 몰아가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신약에 다른 회심의 패러다임이 있다면, 다른 방법으로도 전도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데 긴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전도는 어떤 모습을 띠게 되겠는가?” 이 질문에 대한 내 생각을 12장과 13장에서 만날 수 있다. 회심의 본질을 알려는 노력은 결국 내 박사학위 논문의 주제가 되었다. 이 책은 신약 성경에 또 다른 회심  패러다임이 있다는 주장을 바탕으로 전도 사역의 방향을 연구한 책이다.

 

회심을 일회적 사건이 아닌 ‘과정’으로 본다면 교회에 엄청난 유익이 있으리라 본다. 영성에 관심을 보이고 기독교에 호감을 가진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 바로 이 시대에, 성령님께서 일으킨 이 갈망을 잘 키워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사람들의 필요에 부응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다. 사도 바울과 똑같은 경험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고집하는 한 우리는 이들을 도울 수 없다.

 

물론 갑작스런 회심은 계속 일어난다. 그러나 언제나 그랬듯이 이것은 예외적인 상황이다. 마가복음에 나타난 과정 중심의 회심 패러다임을 면밀히 살피면서 좀더 다수를 포용한 전도법과 마가가 동시대인들에게 원했던 바로 그 좋은 열매를 우리 시대에도 맺을 수 있는 전도법을 개발하길 바란다.

 

 
한 순간의 회심, 간헐적 회심, 그리고 자신도 잘 모르게 경험한 회심

 

회심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정의하는 일은 언뜻 ‘식은 죽 먹기’처럼 보인다. 회심은 누구나 겪을 수 있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교회사의 한 인물을 가리켜 “자, 봐라. 이게 바로 회심이다”라고 말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러나 문제는 여러 세대에 걸쳐 각 개인이 회심한 이야기를 주마간산 격으로 읽는다 할지라도 그 경험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기독교 회심만을 보아도 수많은 유형의 회심이 있다. 예를 들어보자. 어떤 사람들은 각별한 동기 없이 단 한 순간에 신앙을 갖는다. 찰나의 시간에 회심을 경험한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전혀 다른 질서 속에서 산다.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수년 동안 고투한다. 구원 받을 소망이 없어질 무렵에 가서야 드디어 절망에서 빠져나오는데 그것도 과거에 기울였던 노력과는 별 상관없어 보이는 방법으로 회심을 경험한다. 절망은 언제 있었느냐는 듯이 증발해버린다.

 

어떤 사람들은 간헐적으로 회심을 경험한다. 과거를 돌아보면 본격적으로 회심하기 전에 일련의 전환이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그 전환점 하나하나는 전혀 다른 위기 순간에서 맞이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신학적으로 숙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신앙을 갖는다. 심지어 회심했는지 안 했는지 기억조차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누가 진정한 기독교인인지 가르는 기준을 열거한다 해도 그들은 합격이다.

 

회심의 본질에 관해 어떤 말을 더해도 하나님께서 회심을 경험할 수 있도록 우리를 지으셨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본질상 동물 세계에서는 도무지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곰으로 태어나면 영원히 곰이고, 고래로 태어나면 죽을 때까지 고래다. 하지만 인간 본성에는 인지, 정서, 행동, 사회, 종교적으로 의미심장한 변혁을 맞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인간은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뒤집어놓을 수도, 새롭고 긍정적인 방향에서 전혀 다른 삶을 시작할 수도 있다. 이것은 중요한 단서다. 왜냐하면 회심의 본질이 경험 자체가 아니라 경험의 내용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역을 염두에 둘 때 “회심은 한 사람이 무엇으로부터 무엇으로 돌아서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반드시 해야 한다. “어떤 류의 경험을 했는가” “우리가 규정한 틀에 그 경험이 잘 들어맞는가?”라고 물어서는 안 된다. 이런 단서를 단다 해도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진정한 회심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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