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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솔라 -오직 그리스도3,4- 안성진 2017-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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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솔라: 오직 그리스도 (3)

Five Solas 다섯 솔라

 

Sola Scriptura 오직 성경

Solus Christus 오직 그리스도

Sola Gratia 오직 은혜

Sola Fide 오직 믿음

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께 영광

 

종교 개혁자들의 다섯 솔라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서 시리즈를 통해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첫번째로는 오직 성경(Sola Scriptura)’를 통해 성경이 우리의 최종 권위가 되어야 함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두 번째로 살펴볼 솔라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입니다. 오늘날의 교회에서도 많이 들을 수 있는 표현이고 여러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종교 개혁자들이 주장했던 오직 그리스도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보자는 오직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시다라는 의미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죄인인 인간이 나가기 위해서는 중보자가 필요합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제사장들이 그런 일을 했습니다. 물론 그들과 그들이 하던 일은 실체가 아닌 그림자였습니다.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제사장으로서 완전한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갈 수 있습니다. 특별히 히브리서 말씀은 이 부분에 대해서 매우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4:14-16 [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7:23-25 [23] 제사장 된 그들의 수효가 많은 것은 죽음으로 말미암아 항상 있지 못함이로되 [24]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장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느니라 [25]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사도 바울은 예수님만이 오직 유일한 중보자라는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못 박아 말합니다.

 

딤전 2:4-5 [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 그런 당연한 것을 새삼스럽게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지만, 당시의 상황을 생각해 보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이 당연한 진리가 당시의 교회에서는 심각하게 훼손되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단번에 드리신 영원한 제사는 성례라는 이름으로 반복되었습니다. 그 성례를 집행하는 성직자들이 사실상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 역할을 했습니다. 위대한 성인들의 여분의 공적을 통해 연옥에 있는 영혼이나 산 사람들이 당해야 하는 형벌을 면제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며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면죄부(면벌부 혹은 대사부)’라는 것을 발행하여 판매하였습니다. 위대한 성인들 또한 중보자인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어머니로서 우리에 대해 더 잘 말해줄 수 있는 공동 중보자의 위치에 올랐습니다.

 

당시 교회는 예수는 중보자가 아니다.”라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실제로 그들에게 있어 예수님은 중보자로서 부족했고 그래서 다른 중보자들, 눈에 보이거나 혹은 더 좋은 중보자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 부분, 특별히 면죄부를 마르틴 루터는 비성경적이라 생각하고 ’95개조 반박문을 통해 그것에 대해 논쟁하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이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그건 그 당시 교회, 가톨릭 얘기지 우리와는 별로 상관없는 얘기 아닌가?’

안타깝게도, 오늘날 우리와도 상관이 있습니다. 사실 지금은 어느 때보다 다시 한번 오직 그리스도라는 진리를 강하게 선포해야 할 때입니다. 두 가지 측면에서 오직 그리스도라는 진리가 무너진 모습이 교회 안에 들어와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오직 그리스도는 아니다.’는 생각이 교회 안에 들어왔습니다.

 

오늘날의 사회가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가치가 있습니다. ‘다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너와 내가 다르고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 간의 차이는 서로 다름이지 누군가가 틀림은 아니기에 그 차이는 존중을 받아야 하고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차이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고 사회의 질서를 무너뜨리지만 않는다면 말입니다.

 

좋은 가치관입니다. 하지만 절대적인 가치관은 아닙니다. 최소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그렇게 되어서는 안됩니다. ‘오직 성경이 최종적인 권위라면, 이런 좋은 가치관도 성경의 권위 아래에 있어야 합니다. 위에 언급한 다원주의적 가치관은 기본적으로는 성경의 지지를 받는 좋은 가치관이지만, ‘다름틀림을 나누는 기준은 사회 질서, 개인의 행복추구권이 아니라 하나님,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야 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교회 안에 다원주의적 가치관이 잘못 적용되어 종교다원주의로 이어지고 있는 부분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을 얻는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치게 편협하고 배타적인 태도라고 생각하고 그리스도가 아니어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은 사랑이셔서 결국은 누구도 지옥에 보내지 않으시고 천국으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어떤 목회자는 하나님을 뭐라고 부르든 (하나님, 하느님, 부처님, 알라, 천지신명 등등) 신실하게 그 신을 섬기고 최선을 다해 살면 누구나 천국에 갈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사람이 천국에 가고 안가고는 하나님께서 결정하실 일이기 때문에 나는 모른다. 나는 다만 예수님을 믿어서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믿는 것뿐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 갈 수 있지만 예수님께 가는 길은 많다.”고 모호하게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탄절에 스님을 초대해서 강론을 듣게 하는 목사는 대인배로 사람들의 추앙을 받습니다. “결국 모든 종교는 하나다.”를 외치며 다른 종교와의 화합을 추구합니다.

 

다른 종교를 믿는 자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문제는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세상 밖에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그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위해 성경에서 말하는 진리를 바꾸거나 축소하거나 감추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사람에 대해서는 당연히 배타적인 태도를 가져서는 안 되지만 진리는 당연히 배타성을 지닙니다. 진리는 진리가 아닌 것을 포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리스도가 맞는다면 그리스도가 아닌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틀린 것입니다.

 

바울은 누구보다 복음에 열정이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그는 놀라운 유연성을 보여줍니다.

 

고전 9:20-22 [20]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21]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22]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사람들에 대해서 그들을 얻기 위해 바울은 여러 다른 모습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복음 자체의 메시지에 대해서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갈라디아 지역에서 전해지던 그리스도+무엇의 복음에 대해 다른 복음이라고 하면서 그런 복음은 없다고 강력하게 말했습니다(1:6~9). ‘다른복음은 틀린복음이고 그런 복음은 복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복음을 전하면 누구라도 저주를 받아야 한다고 선포하기까지 했습니다. 그가 편협한 사람이어서 그랬던 것이 아닙니다. 진리의 기준을 사람이 아닌 하나님에게 두었기 때문에(1:10), ‘그것도 괜찮다.’라고는 말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도 다른 해석의 여지를 두지 않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베드로도 다른 사도들과 함께 담대하게 오직 그리스도를 선포하였습니다.

 

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이 말씀을 진리라고 믿는다면 어떻게 우리의 머리로 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해서 다른 구원자(중보자)가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그리스도만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보자가 되십니다. 모두가 모든 면에 있어서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사회에서 오직이라고 말하는 것은 쉽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 배타적이지 말아야 하는 것도 옳은 일입니다. 하지만 진리는 진리로서 선포되어야 합니다. 사랑으로 진리를 말해야 합니다.

 

다음 시간에는 좀 다른 측면에서 어떻게 오직 그리스도가 성도들의 삶 속에서 무너져 있는지 살펴 보겠습니다.

 

다섯 솔라 오직 그리스도 (4)

Five Solas 다섯 솔라

 

Sola Scriptura 오직 성경

Solus Christus 오직 그리스도

Sola Gratia 오직 은혜

Sola Fide 오직 믿음

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께 영광

 

 

지난 시간에 이어 오직 그리스도가 오늘날 교회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오직 그리스도는 그리스도 만이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라는 의미입니다. 이 단순하고도 분명한 성경의 진리가 오늘날에는 두 가지 면에서 무너져가고 있습니다. 첫째는 오직 그리스도는 아니다는 생각입니다. 그리스도 외의 중보자가 있음을 많은 교회가 직간접적으로 때로는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그리스도 자체보다는 그리스도의 사역과 역할에 대한 오해와 공격입니다.

 

오직 그리스도가 말하는 예수님의 역할은 중보자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게 하십니다. 예수님을 통해서만 죄로 깨졌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과 원수인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5:10-11 [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11]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보자가 되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막는 죄의 문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습니다. 의롭다고 선포되는 칭의 때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그 후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매일의 삶에서 범하는 죄는 여전히 하나님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 관계가 끊어지지는 않지만, 관계의 친밀함, 다른 말로 하면 교제에는 문제가 생깁니다. 그때도 역시 중보자는 그리스도이십니다.

 

요일 2:1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예수님이 우리의 유일한 중보자시다는 말은 이런 의미입니다. 구원의 시작에서 끝까지 예수님은 중보자가 되십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런 예수님의 역할에 대한 오해가 있고 그 오해가 실제 삶에도 큰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을 그저 내가 죽으면 좋은 곳(천국)으로 갈 수 있게 해주시는 분으로만 이해하는 경우입니다.

 

예수님을 죄인과 하나님 사이의 중보자가 아니라 죽음 이후에 만나는 천국의 문지기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믿는이유는 마치 파스칼의 내기이론에 따르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믿어서 손해 볼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진짜 계신다면 지금 예수님을 믿어 두면 나중에 죽어서 천국에 갈 테니 좋습니다. 혹시 하나님이 없더라도 지금 내가 크게 손해 볼 것은 없습니다. 그러니 그냥 믿는다고 말합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예수님의 역할에 대한 이런 오해는 실제 삶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주일에 교회에 가고 헌금을 하고 하는 것으로 내 할 일은 끝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이 세상에 대한 내 가치관을 근본적으로 바꾸거나 할 이유는 없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나 추구하는 것 중에 죄와 관련된 것이 있더라도 큰 문제는 아닙니다. 그것을 예수님이 대신 담당하셔서 천국에 갈 수 있게 해주신 것이고 난 그 예수님을 믿고 있으니까요.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역할을 이렇게 제한해 두고 내가 당신을 믿고 죽음 이후의 삶을 맡겼으니, 지금 내 삶에는 관여하지 마시오. 혹시 내가 힘들면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은 괜찮지만,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고는 하지 마시오.”라고 말합니다. 영원한 삶과 이 땅에서의 삶, 영적이 일과 육적인 일, 신앙과 삶이 철저히 분리됩니다.

 

구원과 믿음에 대한 심각한 오해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저 예수님이 존재함을 인정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단지 존재에 대한 인정이라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믿음은 관계에 있어서의 신뢰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그 믿음은 삶을 바꿉니다. 야고보가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말한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닙니다(2:17). 행함이 없는, 즉 삶을 달라지게 하지 않는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다는 것도 그가 단지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믿었다거나 하나님에 대해서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분에게 자신의 삶을 맡겼습니다. 단지 죽고 나서의 삶이 아니라 이 땅에서의 삶도 맡겼습니다. 그 확실한 증거로 아브라함은 자신의 아들까지도 믿음으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2:21; 11:17~19).

 

예수님을 믿는 것은 지금의 문제 없는 내 삶에 플러스알파로서 혹은 보험으로서 예수님을 두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내 삶에 내가 해결할 수 없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고 그에 대한 유일한 해결이 예수님이심을 인정하고 겸손히 그분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 치명적인 문제는 우리가 죽으면 지옥에 가게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것도 문제이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의 문제입니다. 창조주이며 주권자, 심판자이신 하나님을 우리가 배반했습니다. 반역했습니다. 등을 돌렸습니다. 그에 대한 결과로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중보자가 되신 것입니다. 단지 지옥 갈 사람을 천국으로 갈 수 있게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수를 자녀가 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사망의 권세 아래 있던 자들을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되게 하셨고 예배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은 좋은 것이고 이 땅을 사는 우리에게 소망이 됩니다. 하지만 그것이 좋은 이유는 그곳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볼 것이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면서 의도하신 아름다운 관계 속에 거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리스도께서 이런 일을 하셨다고 믿는다면, 우리 오늘의 삶을 하나님과 관계없이 살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을 그저 내가 이 땅에서 살 때 나에게 도움을 주는 분으로 이해합니다. 첫 번째와는 전혀 다른 쪽의 극단입니다. 지금 나의 삶과 예수님을 매우 밀접한 관계에 놓지만 어떤 식으로 관계가 있는지에 대해서 오해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예수님을 나에게 복을 주거나 화를 면하게 해주는 존재로만 생각합니다. 마치 우리 조상들이 이미 죽은 조상들을 잘 모시면 복을 받고 화를 면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지극 정성으로 조상들을 모셨던 것과 비슷합니다. 혹은 어떤 자연의 신이 노해서 내가 화를 입지 않도록 하거나 이미 당하고 있는 화를 멈추기 위해 신을 달래주는 일을 했던 것과도 비슷합니다. 단지 그런 대상이 예수님혹은 하나님으로만 바뀐 것 뿐입니다.

 

예수님을 이런 분으로 이해하면 중요한 것은 얼마나 내가 하는 일이 잘 풀리고 자녀가 성공하고 부모님이 건강할 것이냐는 것입니다. 내가 잘 되는 것이 곧 내가 예수님을 믿고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혹시 잘 안 풀리는 일이 있다면 뭔가 내 공적이 부족하다는 의미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내가 얼마나 열심히 예수님을 섬기느냐는 것입니다. 뭔가를 열심히 해서 신에게 좋은 점수를 얻는 것이 중요한 일이 됩니다. 혹은 신의 심기를 건들지 않아서 내가 무슨 해를 입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좀 더 현대적으로, 요즘에는 세상에서 말하는 심리학에 예수님을 슬쩍 끼워 넣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통해 자존감을 높이고 과거의 트라우마를 극복합니다. 가정 문제, 직장 문제, 학교 문제 등에도 심리학이 제시하는 해법에 예수님이 살짝 얹혀 있습니다.

 

물론 이런 일들이 전혀 의미가 없고 예수님이 하시는 일도 아니라는 말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이런 것을 원하시지 않는다는 말도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이런 복을 누릴 수 있고 궁극적으로 이런 문제의 유일한 해결도 예수님이십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우리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되면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보자가 아니라 우리가 원하는 것들과 우리 사이의 중보자가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끌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우리 삶을 통해서 이루시게 하시는 것이지, 단지 내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게 하는 (실존하지도 않는) 램프의 요정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보자이십니다. 그것이 오직 그리스도의 의미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역할을 제한하거나 혹은 역할을 바꾸는 것은 우리가 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내가 원하는 예수님을 섬길 수는 없습니다. 다 그렇지는 않을지 몰라도 조금씩은 우리에게 이런 모습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알게 모르게 우리는 세상의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에 예수님을 상관없는 분으로 여기고 있는 곳은 없는지, 혹 잘못된 목적으로 예수님을 이용하고 있는 부분은 없는지 우리 삶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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